Archive for 4월 14th, 2013
엘비스 프레슬리를 닮은 나사엔지니어
얼마 전 올림픽 중계를 제쳐놓고 본 실황중계가 있었다. 나사(NASA·미국 항공우주국)의 큐리오시티 화성탐사선의 화성 착륙 중계였다. 시속 1600㎞의 무서운 속도로 화성의 대기권으로 진입하는 900㎏의 탐사선을 낙하산에 이어 로켓 분사력으로 감속시켜 안전하게 착륙시킨다는 어려운 임무도 그렇거니와 그 과정을 ‘7분간의 테러’라고 명명해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나사의 홍보감각도 칭찬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눈길을 끈 것은 방송에 등장한 독특한 나사 엔지니어의 모습이었다. 이 어려운 임무를 지휘하는 리더로 나오는 이 엔지니어는 마치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듯이 머리에 기름을 발라 빗어 올리고 구레나룻을 기른 외모의 사나이였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공붓벌레 스타일의 천재 엔지니어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어쩐지 범상치 않아 보여 이 사람에 대해서 찾아봤다. 그는 나사의 선임엔지니어인 애덤 스텔츠너였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다음은 언론 보도와 위키피디아에 소개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별로 똑똑하지 못한 아이”라는 말을 들었다. 친아버지에게서 “넌 막노동꾼 이상은 될 수 없을 거야”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 부모가 얼마나 그에게 실망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고교 때는 기하학에서 F플러스(+)로 간신히 낙제를 면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두 번이나 계속 수준 미달의 결과를 가져오는 그를 담당 교사가 다시 보기 싫어서 그냥 플러스를 붙여 통과시켜 준 것이라고 한다. 공부 대신 그는 고교 시절 섹스, 마약, 로큰롤에 탐닉했다. 당연히 고교 졸업 후에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클럽밴드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록스타가 되는 것을 꿈꿨다.
그렇게 생활하던 그는 어느 날 클럽에서 연주를 마치고 밤늦게 집에 돌아가다가 밤하늘을 보고 별의 위치가 바뀐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매력에 빠졌다고 한다. 별의 움직임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그는 커뮤니티칼리지에 들어가 천문학 강좌를 수강하려고 했다. 그런데 천문학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물리학 강좌를 이수해야 했다. 물리학 수업 첫번째 시간에 접한 공식을 통해 그는 자연현상의 법칙을 연구하는 이 학문이 그가 원하던 것임을 알게 됐다. 그는 “나는 나의 종교를 찾아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듬해 그는 음악을 완전히 접고 공부에 몰두해 결국 UC데이비스에 진학해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그런 뒤 캘리포니아공대(칼텍)에서 석사, 위스콘신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다음 나사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 10년 동안 큐리오시티 탐사선 프로젝트에서 화성 착륙 시스템의 디자인 및 실행 작업을 지휘했다. 마치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그는 멋지게 성공시켰다.
스텔츠너의 인생 궤적을 따라가 보면서 열정을 바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금 느꼈다. 그리고 또 천재는 꼭 타고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평생 ‘동기부여’를 해줄 대상을 찾는 것이다. 자신의 ‘종교’를 찾아낸 스텔츠너가 무인탐사선의 화성 착륙이라는 전인미답의 일을 성취해낼 수 있었던 이유다.
명문대 입학만을 목표로 하는 암기형 공붓벌레 영재들을 키워내는 것보다 우리 아이들이 평생을 바칠 수 있는 ‘꿈’을 찾도록 도와주는 교육이 ‘참교육’이 아닐까 문득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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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14일자 한겨레신문 [임정욱의 생각의 단편]칼럼으로 기고한 글이다. 사실 CBS뉴스에서 접한 아담 스텔츠너의 모습을 보고 호기심이 동해서 찾아봤었다. 그리고 가볍게 ‘쿨한 나사엔지니어들’이란 블로그포스팅을 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칼럼용으로 조금더 가다듬어서 한겨레신문에 기고(라고 쓰고 재탕이라고 읽는다)한 것이다. 세상엔 참 멋진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아시안이 점령한 잡스의 고향
보스턴에서 실리콘밸리로 이사 온 지 두 달이 지났다. 비록 같은 나라 안이긴 하지만 동부에서 서부로 옮긴다는 것은 마치 다른 나라로 이주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그렇다. 전에 살던 보스턴의 교외지역은 백인이 주류인 유서깊은 곳이었다. 중국인, 인도인 등 아시안 인구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백인이 90% 가까운 인구를 점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백인들 사이에 끼여 소수자로 사는 것에 익숙했다.
그런데 실리콘밸리 지역의 중심에 있는, 우리 가족이 자리잡은 쿠퍼티노는 그 반대다. 이곳은 아시안이 주인인 곳이다. 인도계와 중국계가 점령한 쿠퍼티노에선 백인들을 보기가 힘들다. 우리 애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중학교에는 한 반에 백인 학생이 1~2명밖에 없을 정도다. 그들마저 인도·중국계 엄마들의 치맛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얼마 전 지인의 초대로 그분이 다니는 반도체회사의 야유회에 간 일이 있다. 행사에 온 직원들 대부분이 아시안 등 비백인이었다. 백인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보일 정도였다. 말레이시아계 화교가 창업한 회사라서 그런지 더더욱 아시안이 많고 백인은 마케팅이나 재무 부서에 좀 있는 정도라는 설명을 들었다. 전세계에 직원이 수천명인 수조원 가치의 회사가 그렇다.
집 근처에는 걸어서 갈 만한 거리에 일본·인도·중국·아랍식 식료품 슈퍼가 있고, 차로 5분 거리에 한국 슈퍼가 있다. 각 민족의 인기식당에 갈 때면 중국, 인도, 일본 등에 가 있는 느낌이 난다.
쿠퍼티노는 애플의 본사가 있는 곳이다. 스티브 잡스가 쿠퍼티노의 홈스테드고교를 졸업하던 72년에는 거의 100% 백인만이 살던 동네였다. 잡스와 애플의 고향이 이렇게 아시안들에게 점령이 되어 있는 줄은 몰랐다.
인텔, 에이치피(HP), 시스코시스템스 등 글로벌 아이티(IT) 기업과 구글·페이스북 등 새로운 인터넷 강자들의 보금자리인 실리콘밸리는 미국 경제의 희망이다.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구원자이기도 하다. 그런 이곳이 아시안의 힘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저임금 직종에 종사하기 위해 유입된 히스패닉 이민과 달리 대개 석·박사급의 고급인력인 아시안들은 이곳 기업들의 연구개발 분야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곳에서는 백인 엔지니어를 구경하기가 힘들 정도다.
유시(UC)버클리의 교수인 비벡 와드와의 2009년 조사에 따르면, 실리콘밸리의 벤처기업 중 이민자가 창업한 비율은 52%에 달한다. 실리콘밸리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혁신의 힘이 이민자에게서 나온다는 증거다.
실리콘밸리의 혁신 비결을 열대우림의 생태시스템에 비유해 분석해낸 ‘레인포레스트’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벤처캐피털리스트 빅터 황은 ‘왜 실리콘밸리는 계속해서 혁신을 이어나가는데 다른 지역은 그렇지 못한가?’라는 질문에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그는 열대우림의 다양한 잡초에서 억센 생명력이 나오는 것처럼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교류가 일어나면서 가장 큰 경제적 효과가 나온다고 설명한다. 또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피부색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관습과 문화를 뛰어넘어 열린 마음으로 서로 신뢰하고 일하는 곳이 실리콘밸리라고 한다. 이종 간의 협업과 실험을 통해 기발한 혁신이 나온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에 와서 살면서 이 지역의 다양성과 외부인에 대한 포용력에 새삼스레 감탄했다. 다문화에 대한 이런 관용과 포용력이 없이는 인재 부족으로 오늘날의 실리콘밸리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참, 항상 청명하고 쾌적한, 축복받은 날씨가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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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2년 9월4일자로 기고했던 [임정욱의 생각의 단편]칼럼. 기록을 위해서 블로그에 다시 옮긴다.
처음 쿠퍼티노에 가서 예상과 달리 도서관, 상점 등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대부분 중국, 인도인이라는 것을 보고 “이곳이 애플의 본사가 있는 곳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평일에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백인들은 자세히보면 애플직원이고 실제 주민들은 대부분 아시안이다. 학교에 가서 애들 학부모들과 이야기해보면 거의 획일화되어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거의 대부분 IT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다들 어딘가에서 미국으로 이민온 사람들이다. 사실 쿠퍼티노뿐만이 아니고 실리콘밸리 전체가 이렇게 변모해가고 있다. 내가 버클리에 다니던 10년전보다도 휠씬 많이 늘어난 느낌이다.
이처럼 이방인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것이 실리콘밸리다. 이방인들이, 특히 각국의 인재들이 와서 살고 싶게 만드는 것이 실리콘밸리의 으뜸 경쟁력이다.
프로야구 선수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지난주 샌프란시스코의 한 저녁모임에 다녀왔다. 한국에서 실리콘밸리 연수를 온 대학원생들을 만나는 자리였는데 스탠퍼드대에서 유학중인 공대 학생들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학생들의 전공이 모두 전산학(컴퓨터과학)이었다는 점이다. “요즘 한국 학생들은 모두 전산 전공으로 몰린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인기입니다”라고 그중 한 학생이 말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서는 공대와 전산학이 별로 인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요…”라고 토를 달았다. (참고 : [위기의 한국 SW 산업] 명문대 나와도 SW개발자는 시간급 인생…”장가가기도 힘들어” -조선일보 2011)
미국에서 전산학의 인기는 통계가 뒷받침한다. 스탠퍼드대에서 지난해 전산학 전공 학생은 220명으로 가장 많았던 2000년의 등록 인원보다도 25%가 더 많다고 한다. (참고: 스탠포드엔지니어링뉴스) 스탠퍼드대뿐만이 아니고 미국 대학 전반적으로 전산학이 인기를 얻고 있다. 높은 실업률 속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최고의 유망직종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의 각종 직업 관련 조사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유망직업 1순위로 꼽히고 있다. 창의력을 요구하는 도전적인 직업인데다 나이를 먹어서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소프트웨어가 첨단기술 회사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거의 모든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이 되면서 시장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스탠퍼드 학생들을 만난 이야기를 트위터에서 전하자 @doniikim님은 “우리나라와는 반대네요. 서울대 컴퓨터공학부도 미달까지는 아니지만 매 학기마다 자퇴생들이 많다고 합니다”라고 답했다. 한국도 정보기술(IT) 강국의 반열에 드는 나라인데 왜 미국과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는 직업을 바라보는 양국의 문화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오래 일한 일본의 벤처기업가 나카지마 사토시는 “미국의 아이티 업계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프로야구 선수 같은 존재”라고 비유한 바 있다. 실제로 얼마 전 실리콘밸리의 유명 인터넷업체인 넷플릭스를 방문한 블로거 김동주씨는 “넷플릭스의 엔지니어들을 프로야구 스타플레이어처럼 대우하는 문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구단은 선수가 최상의 컨디션에서 최고의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스타플레이어에게는 그에 맞는 최상의 대우를 한다. 이처럼 회사도 뛰어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게 프로야구 선수 같은 대우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화는 소프트웨어산업은 개인의 창의력을 기반으로 한 분야이고 그렇기 때문에 개인을 예술가처럼 대접해줘야 한다는 철학을 기본으로 깔고 있다.
반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소프트웨어산업을 일종의 건설산업처럼 대한다. 대기업이나 정부는 소프트웨어를 직접 개발하지 않고 대형 아이티 회사에 맡긴다. 대형 아이티 회사는 이런 프로젝트를 수주해서 작은 하청소프트웨어업체에 또 맡긴다. 하청업체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납품 날짜까지 제품을 완성하기 위해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매달린다. 개인의 실력 차이를 인정하기는커녕 비용은 국가가 정한 소프트웨어 노임 단가를 기준으로 경력에 따라 일률적으로 정해진다. 단가가 높은 나이 많은 엔지니어는 관리자가 되지 못하면 밀려나야 한다. 이런 풍토에서 똑똑한 젊은이들이 전산학을 선택해주길 바라는 것은 무리다.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최고와 평범한 엔지니어는 100배의 실력 차이가 날 수 있다”며 그가 창의적 인재를 뽑기 위해 들이는 노력에 대해 설명한 바가 있다. 우리 인재들이 전산학, 더 나아가 이공계에 매력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인재를 우대하는 문화와 제도를 우선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몇 안 되는 인재들마저 모두 외국으로 빠져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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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24일자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칼럼이다. 썼던 글을 정리하다가 빠진 것을 알고 블로그에 백업했다.
이 글은 2010년에 “일본에서 아이폰같은 혁신적인 소프트웨어제품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썼던 블로그포스팅의 내용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일본의 나카지마 사토시씨의 글을 읽고 공감이 되서 내용을 소개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소개한지 몇년지난 지금에도 한국의 사정은 그다지 변하지 않은 듯 싶다. 능력있는 소프트웨어엔지니어들은 여전히 해외에서 일을 하는 것을 꿈꾼다. 개인적으로 나를 찾아와서 미국으로 전직이 가능할지에 대해서 자문을 구한 엔지니어들도 몇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공학과정으로 이름난 미국의 한 대학 학부과정에 다니는 아는 한인학생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 학생은 최근 2년간 두번의 여름방학 인턴을 미국의 인터넷기업과 한국의 IT대기업에서 각각 했다. 이번 여름에 또 섬머인턴자리를 구하는 이 학생과 한번 통화했는데 “한국에서 엔지니어생활을 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탑다운방식에다가 조직의 부속품처럼 시키는 일만 해야하는 한국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문화가 답답하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활발한 창업, 성공, 재창업이 이뤄지는 벤처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뛰어난 엔지니어풀이 밑거름이 되야한다. 그러니까 이런 인력을 잘 양성하고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복돋워주는 정책과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위 칼럼에 썼던 것처럼 몇 안되는 인재들마저 모두 외국으로 빠져나갈까봐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