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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전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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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미국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한국 쪽이 주최하는 콘퍼런스에 초청되어 간 일이 있었다. 정부의 실세 고위인사가 인사말을 하는 귀빈으로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는 행사였다. 대부분이 일반인인 청중 수백명이 자리에 앉아서 행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행사장 옆에 마련된 큰 방에는 관련 업계의 대표, 유명 교수 등이 빼곡히 앉아서 행사 시작 전에 그 고위인사와 차를 한잔하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행사시간이 되어 가는데도 그 고위인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다들 잡담을 나누며 지루하게 기다렸다. 거의 30분을 지각한 그 인사는 별로 미안해하지도 않고 기다리던 귀빈들과 일일이 악수를 한 뒤 행사가 지체되고 있는데도 앉아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잠시 후 지루하게 행사 시작을 기다리던 청중 앞에 나가 형식적인 축하의 인사말을 한 뒤 귀빈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또 다음 일정 때문에 바쁘다”며 일찍 떠나버렸다. 행사의 실질적인 내용인 강연이나 토론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은 것이다. 그 인사가 떠난 뒤 다른 귀빈들도 뒤따라 빠져나갔다.

당시 나는 한국이 참으로 대단한 ‘의전사회’가 됐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한시간여의 ‘의전적인’ 행사 동안 업계의 현안 등 실질적인 얘기는 전혀 오가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비위를 맞추는 공허한 덕담만 오갔다. 그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어쩌면 중요한 미팅이나 출장 일정도 미루고 온 민간기업 중역들의 시간은 누가 보상할까. 또 알맹이 없는 귀빈들의 축사를 듣느라 낭비된 청중들의 시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더 나아가 그때 내가 우려한 것은 그렇게 중요한 국정을 살피는 분이 형식적인 행사와 모임에 참석하느라 도대체 일을 할 시간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듣자 하니 장차관 이상 고위인사들의 점심과 저녁 식사는 거의 한달 전에 다 찬다고 한다. 요즘에는 조찬모임도 흔하다. 잘못하면 새벽부터 저녁까지 행사장과 식사 약속 자리를 계속 이동하기만 하다가 하루를 다 보낼 수 있겠다 싶었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서 읽고 공부해야 할 것이 차고 넘치는 시대에 과연 저렇게 시간을 낭비해도 되는 것일까. 저렇게 해서 세계적인 리더들이 방문했을 때 그들을 감복시킬 만한 통찰력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인가.

이상한 해경 인력 배치..수색보다 '윗분 의전'-SBS뉴스 5월7일보도. (위 사진을 누르면 기사로 이동)

이상한 해경 인력 배치..수색보다 ‘윗분 의전’-SBS뉴스 5월7일보도. (위 사진을 누르면 기사로 이동)

의전사회의 폐해는 세월호 참사에서도 드러났다. 높은 사람이 오면 그에 맞춰서 의전을 준비하는 데 익숙해진 공무원들은 현장에서 고통받는 희생자 가족들의 입장에서 배려하는 방법을 몰랐다. 위기상황에서 효율적으로 구조활동을 펼치는 방법에 대한 매뉴얼은 없는데 높은 사람들을 모시는 의전방법은 매뉴얼로 머릿속에 박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한국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과도한 의전문화를 없애자고 제언하고 싶다. 쓸데없는 의전에 소비하는 시간을 줄이면 그 시간에 사색하고 실질적인 대화를 하고 보고서를 깊이있게 읽고 토론할 수 있다. 행사 진행자들이 높은 사람이 아닌 일반 참석자들을 위해서 더 많은 배려를 하고 내실있는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필요하지 않은데도 끌려들어가서 자리를 지켜야 하는 회의에 대해서 불평한다. 안 가도 되는 불필요한 회의와 외부 미팅이 많은 문화의 회사에 다니다 보면 업무시간에는 일을 못하고 결국 야근과 주말근무로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과도한 의전문화도 똑같다. 윗사람들이 형식적이고 관행적인 행사를 쫓아다니는 동안 조직 전체의 효율성은 떨어진다. 대한민국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 리더들부터 솔선수범해서 이런 형식적이고 권위적인 의전문화를 없애보면 어떨까.

***

한겨레 ‘임정욱의 생각의 단편’으로 마지막으로 쓴 칼럼. 2012년 6월에 시작해서 2014년 5월까지 1년11개월동안 연재했다.

Written by estima7

2014년 5월 8일 , 시간: 11:01 오후

생각의 단편에 게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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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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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 잘 보았습니다. 경직된 조직문화 내에서는 언급하신 것처럼 내실 있는 대화보다는 서로의 기분만 살피는 회의가 이어질 것 같고, 실제로 여러 분야에서 그렇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공감대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네요.

    Moon Son

    2014년 5월 9일 at 10:39 오전

  2. 딱히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그러고 싶지는 않을텐데
    본인도 참석하는게 낭비라고 생각을 할겁니다
    그런데 통상 관례상 그렇게 해온거고 참석 해왔눈데
    안하면 어떤 비난이 올까 걱정되고
    그런것들이 뭉쳐져서 그런것 아닐까요

    kimjunho79

    2014년 5월 13일 at 4:43 오후

  3. 업무에 실패하는 자는 용서받아도, 의전에 실패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불문율이 있죠…

    Sean Park

    2014년 5월 15일 at 10:17 오전

    • 옛날에 해외에서 만난 제 선배가 (주재원같은) “일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다. 사실 내 평가의 60~80%는 여기 오시는 높은 분들 의전에서 판가름난다”고 말해주셨던 기억이…

      estima7

      2014년 5월 15일 at 10:28 오전

  4. 우연히 귀하의 글을 읽고 수행운전기사직에 근무하는 운전원으로서 저의 느낀점을 말씀드립니다.
    이상하게도 열번 잘하다가도 한번의 실수라도 하면
    그동안의 쌓였던 신뢰감도 물거품이 됩니다.
    특히나 수행기사직은 본인도 모르게 윗분 눈치나 보는 이상한 습관이 듭니다. 물론 성격도 한몫하지만
    가끔은 서러운 생각이 듭니다.

    윤 호상

    2015년 2월 18일 at 9:26 오전

    • 모시는 분도 수행기사분을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대해주면 좋을텐데요. 힘내세요!

      estima7

      2015년 2월 18일 at 10: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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