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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 정상의 글도 실어주는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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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기고문이 실린 9월12일자 NYT Op-ed면.

푸틴의 기고문이 실린 9월12일자 NYT Op-ed면.

지난주 <뉴욕 타임스>는 백악관과 미국 의회를 발칵 뒤집어놓는 글을 실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기고문을 게재한 것이다. 이 글에서 푸틴은 “점점 많은 세계인들이 미국을 민주주의 모델이 아닌 폭력에만 의존하는 국가로 여긴다”고 썼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시리아 공격 계획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 비유하면 한국의 대표 신문이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한국 비판 글을 받아서 실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푸틴이 글에서 주장하는 내용의 정당성은 차치하고라도 나는 이처럼 다양한 인물의 다양한 견해를 과감히 수용해 게재하는 뉴욕타임스의 편집 방침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사설과 칼럼이 실리는 지면을 미국 신문에서는 옵에드(Op-Ed)면이라고 한다. 푸틴의 기고문이 실린 옵에드면을 의견-사설면(Opinion-Edtorial)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여기서 옵에드는 ‘사설의 반대’(Opposite-Editorial)의 약자다. 논설위원들이 무기명으로 작성하는 신문사의 공식적인 주장인 사설과 대치되는 의견이라는 뜻이다. 1970년에 처음 등장한 뉴욕타임스 옵에드면은 회사 외부인들의 뉴욕타임스와는 다른 의견을 소개하고자 만들어졌다.

이런 외부인의 다양한 시각을 담은 글은 뉴욕타임스의 지면을 차별화한다. 그리고 간간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는 글이 나온다.

2012년 골드만삭스의 간부였던 그레그 스미스는 ‘왜 나는 골드만삭스를 떠나는가라는 기고문으로 월스트리트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글이 뉴욕타임스에 실리는 날 새벽에 보스에게 사직 이메일을 보낸 그는 작심하고 직접 경험한 탐욕스러운 골드만삭스의 문화에 대해서 기고문을 통해 조목조목 고발했다. 골드만삭스의 주가는 그날 3.4% 하락하고 이후 월스트리트의 탐욕에 대한 보도가 잇따랐다.

2011년에는 억만장자 워런 버핏이 ‘슈퍼리치 감싸기를 멈추라’라는 글을 기고해 자신의 소득세율이 자기 직원들의 그것보다 훨씬 낮다고 고백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부자들이 솔선수범해서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정치권부터 언론까지 광범위한 토론이 이어졌다.

얼마 전에는 유명 할리우드 배우인 앤절리나 졸리가 ‘나의 의료 선택’이라는 글을 기고해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졸리가 유방암 예방 차원에서 이중 유방절제술을 받은 사실을 용기 있게 밝히면서 세계적으로 유방암의 위험에 처한 여성들에게 조명이 집중된 것이다.

이런 글들은 뉴욕타임스에 실린 뒤 텔레비전·신문·라디오·SNS에 후속 보도와 토론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에게 ‘생각해볼 거리’를 던진다. 꼭 뉴욕타임스 독자가 아니더라도 웬만하면 내용을 알게 될 만큼 파급효과가 엄청나다.

뉴욕타임스는 매주 수천통씩 들어오는 기고문을 모두 읽어보고 채택 여부를 결정한다. 대부분은 거절되지만 채택하기로 결정된 글의 경우에는 면밀한 사실확인과 편집을 거쳐 작성자 본인의 동의를 받은 뒤에 발표된다. 이런 글들은 뉴욕타임스 사설과 유명 칼럼니스트의 글과 나란히 게재된다.

유명인사라고, 외국의 정상이라고 우대해서 글을 실어주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시의성이 있고 색다른 시각을 제공해 논쟁을 유발할 수 있는 좋은 글이어야 한다. 푸틴의 기고는 시리아 사태와 관련해 시의적절하게 들어왔으며 논쟁점을 잘 부각한 좋은 글이었기 때문에 게재했다는 것이다.

갈수록 당파성이 심해지는 한국의 신문에서 신문사의 논조와 배치되는 시각을 담은 외부 기고자의 글을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됐다. 회사 논조와 다르더라도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겸허히 경청해 소개하고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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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7일자 한겨레지면에 [임정욱의 생각의 단편] 칼럼으로 기고한 내용.

이번 칼럼차례에서는 유독 마지막까지 어떤 내용을 써야할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곤혹스러웠다. 꼭 데드라인이 닥쳐야 글을 쓰는 평생의 버릇 때문에 일요일을 소비한다. (한달에 한번씩 일요일오후가 데드라인이다.)

그러다가 NYT 목요일자에 실려 화제가 된 푸틴의 기고문을 떠올렸다. 안그래도 오바마와 푸틴이 서로 사이가 안좋아 불편하고 으르렁거리는 사이가 됐고, 시리아사태에 있어서도 양국이 완전히 상반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오바마의 앙숙과도 같은 푸틴의 글을 과감히 받아서 실은 NYT의 편집이 신기했다. 특히 진보적이며 항상 오바마의 정책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NYT 아닌가.

그리고 떠올려보니 ‘왜 나는 골드만삭스를 떠나는가'(그레그 스미스), ‘수퍼리치 감싸기를 멈추라'(워런 버핏), ‘나의 의료선택'(앤절리나 졸리) 같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NYT Op-ed면 기고문들이 생각났다. 당시에 얼마나 화제가 됐는지 내 기억에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글들이다. NYT에 실린 날, 이 내용을 미국의 거의 모든 언론이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래서 이 내용을 가지고 칼럼을 쓰기로 하고 Op-ed면의 역사에 대해서 몇개의 글을 읽고 공부했다. 위키피디아의 Op-ed소개 항목 외에도 NYT의 Op-ed에 대한 자세한 소개글 ‘And Now a Word From Op-Ed‘, 푸틴의 글이 실리게 된 경위를 소개한 NYT 퍼블릭에디터의 글 ‘The Story Behind the Putin Op-Ed Article in The Times’ 등을 참고했다.

다만 좀 쫓겨서 쓴 탓에 글이 나가고 나서 몇가지 비판을 받았다.

우선 제목을 ‘적국 정상의 글도 실어주는 신문’으로 한 점. 러시아가 미국의 라이벌국가이긴 하지만 적국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며 많은 부분에서 미국의 외교정책과 러시아의 외교정책이 대척점에 있고 특히 푸틴과 오바마의 사이가 나쁘다는 점에서 좀 강력하게 제목을 써봤다. (미국 뉴스에서 푸틴을 “Foe”라고 지칭하는 것을 들은 일도 있다.) 그리고 사실 좋은 제목 아이디어가 없어서 급하게 붙이고 한겨레에 보냈는데 수정 않고 그대로 내보내주셨다. 그래서 문제제기성 코맨트를 여러번 받았다. 내가 좀 경솔했다.

두번째로 Opposite-Editorial의 Opposite를 ‘반대’로 번역했는데 ‘반대편’이 조금 더 적절할 뻔 했다. 사실 ‘반대’와 ‘반대편'(다른쪽)의 두가지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NYT를 너무 미화한 것 같아서 찜찜하기도 했다. 짧은 분량 탓에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었는데 미국신문들도 자신들의 성향에 따라 입맛에 맞는 외부기고를 받는 경향이 물론 있다. WSJ 같은 경우 보수적이고 항상 오바마를 비판하는 칼럼으로 가득하다. NYT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번 푸틴 칼럼의 경우처럼 전혀 의외의 인물의 다양한 시각을 담은 글을 게재하는 경우가 NYT는 많은 편이다. 그래서 소개하고 싶었다.

영어적인 표현이 많아서 문장이 부자연스럽다는 지적도 받았다. 미국에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은 것 같고, 또 퇴고를 소홀히 한 탓이기도 하다.

어쨌든 한겨레 지면을 포함해서 너무 한쪽의 정치적인 주장만 넘쳐나는 글이 가득찬 한국신문의 오피니언면은 좀 피곤하다. (나만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세상을 좀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새로운 생각거리, 논쟁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글들이 실리는 오피니언면을 바라는 마음에서 좀 주제넘은 글을 써봤다.

Written by estima7

2013년 9월 17일 , 시간: 4:37 오후

생각의 단편에 게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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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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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위에서 덧붙였인 내용처럼 투작하기에 더욱더 좋아하게 됩니다.

    유창완

    2013년 9월 17일 at 5:12 오후

    • ‘투작’이 무슨 뜻인지요?

      estima7

      2013년 9월 17일 at 5:17 오후

  2. 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글 쓰시고 난 후 돌아온 반응 들과 그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아쉬움을 적어주셨는데, 글쓰기의 전반적인 과정, 생각의 흐름들 을 함께 느낄 수 있어 좋네요.

    최원석

    2013년 9월 17일 at 5:13 오후

    • 요즘엔 글에 대한 반응을 SNS를 통해서 받을 수 있기에 무척 흥미롭고 자극이 됩니다. 무플보다 악플이라고 하지요. ㅎㅎ 뭔가 반응이 있어야 쓰는 재미도 있는 법입니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통해 온 반응이 많은데 반해 정작 한겨레 칼럼페이지에서는 거의 댓글이 달리지 않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stima7

      2013년 9월 17일 at 5:16 오후

  3. 저도 NYT의 Op-Ed섹션을 제일 좋아합니다. 시간없을 때는 이 섹션만이라도 읽을려고 하고 있어요. 특히 폴 크루그만, 데이비드 브룩스, 토마스 프리드만 등의 최고의 칼럼니스트들이 쓴 칼럼은 다양한 주제와 생각을 담고 있어서 정말 재미있더군요.

    Ellery

    2013년 9월 17일 at 6:24 오후

  4. 저는 갈수록 글을 편식해서 technology 쪽 글들만 읽게 되는데, 덕분에 정치와 언론에 관한 내용을 따라잡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Sungmoon

    2013년 9월 17일 at 11:16 오후

  5. 저도 아직은 러시아가 적국이라는 인식이 남아있는데…미국인들의 순위는 6위로 격차가 꽤 있네요.
    작년 캡럽 조사 결과 순위는 1. Iran: 32%, 2. China: 23%, 3. North Korea/Korea (nonspecific): 10%, 4. Afghanistan: 7%, 5. Iraq: 5%, 6: Russia: 2%
    미국 자신을 적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도 1%라는 흥미로운 조사 결과네요. ㅎㅎ
    (* 출처: http://www.gallup.com/poll/152786/americans-rate-iran-top-enemy.aspx )

    Elca Ryu (@elcaryu)

    2013년 9월 18일 at 4:16 오후

  6. 흥미로운 기사 잘 보고 갑니다.. Opposite -side 에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하는 NYT 에 관심이 많이 갑니다.. 한번 원문을 읽어 보아야 겠네요…

    rapael99

    2013년 9월 21일 at 5: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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