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걸려 쓴 책, 십년 걸려 쓴 책
기획출판으로 책이 뚝딱뚝딱 나오는 시대. 한국 서점에 가서 인기있다는 책들을 들춰보는데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목차를 보니 참으로 천편일률적인 내용이 적혀있는 책들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책을 너무 쉽게 쓴다고 할까. 유명인의 책이면 내용이 없어도 무조건 팔리는 것인가. 조류에 맞춰 빨리 책을 내야해서 그런 것인가. 심지어 일주일만에 책을 써낸다는 분도 계시다. (직접 보지 않아서 평가하긴 어렵지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쓸 수 있을까 솔직히 믿기 어렵다.)
그런데 지금 내가 절반쯤 읽고 있는 33대 미국대통령 해리 트루만의 전기 “Truman”를 보면 책의 가치, 작가의 자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총 1120페이지짜리 대작. 이 지루할 것 같은 전기가 읽기 시작하면 손을 놓지 못하게 하는 흡입력이 있다. 고졸출신 미주리 시골촌놈이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되서 일본에 원자탄을 투여하는 결정을 내리고, 2차대전을 수습하고, 마샬플랜으로 유럽을 지원하고 한국전까지 이끄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 덕분에 트루만의 재평가가 이뤄졌다는 말이 수긍이 간다.
세계최강국인 미국을 가장 어려운 시기에 이끈 한 인간의 모습을 따라가면서 당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고뇌, 리더쉽의 중요성 등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나의 인생과 비교하면서 용기까지 얻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엄청난 책을 써낼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며 데이빗 맥컬로라는 79세의 역사학자에 완전히 매료됐다. 그의 글솜씨도 탁월하지만 한 인간의 인생을 인간과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자세히 묘사해냈다는데 감탄해서 (트루만을 읽고 있는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맥컬로라는 작가에 대해서 위키피디아 등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더더욱 이 작가에 매료되어 버렸다. 다음은 그가 ‘Truman’을 어떻게 썼는가에 대해 소개한 NYT기사의 일부다. 책을 출간할 당시 그는 58세였다.
- 맥컬로는 친척과 경호원을 포함해 생전의 트루만을 아는 사람을 수백명을 인터뷰했다. 트루만이 생전에 쓴 편지와 관련된 사람들의 문서를 끝도 없이 읽었다. 그리고 트루만에 대해서 쓰여진 거의 모든 책을 다 읽었다.
- 트루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맥컬로는 트루만 생전의 습관을 그대로 흉내내고 재현해보고자 했다. 예를 들어 트루만처럼 아침산책을 했고 트루만의 고향인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잠시 살기도 했다. 그리고 루즈벨트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했을 때 트루만이 달려갔다는 미국 의회에서 백악관으로 길을 그대로 따라서 답사하기도 했다. 당시 트루만이 놓은 모든 상황에 대해서 공부한 다음 자신을 그 환경에 두고 트루만의 심리상태를 이해해보고자 한 것이다.
- 책을 쓰면서 맥컬로는 모든 페이지 초고를 부인에게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부인이 그 페이지들을 자신에게 다시 읽도록 해 들어보았다. 이렇게 한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렇게 하면 볼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용의 쓸데없는 반복이라든지 어색한 문장 같은 것 말이죠. 화가들은 자주 자신의 작품을 거울에 비춰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 캔버스에서 바로 봤을때 보이지 않던 문제가 보이기도 하니까요.”
- 맥컬로는 이 책을 10년간에 걸쳐서 썼다. 그 10년동안 그의 인생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가장 어린 딸이 소녀에서 여인이 됐고, 그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고, 그의 가족이 두번 이사를 갔으며 애들을 대학에 보내고 주택장기융자를 다 갚았다. 그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이렇게 공을 들여 써서 92년 출판된 “Truman”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의 다음 작품은 7년 걸려서 집필해 2001년 출간한 미국의 2대대통령에 대한 전기 “John Adams”였다. 미국 역사상 가장 빨리 팔린 논픽션책중 하나이며 역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 다음에 2005년에 출간된 맥컬로의 다음 작품 “1776”은 그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초판만 1백25만부를 찍었다고 한다.
내가 데이빗 맥컬로의 책을 읽어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우연히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서 그의 인터뷰를 접하고 나서다. 아랫 부분인데 특히 이 대목이 웬지 눈에 들어왔다. 노작가의 겸손.
두번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수많은 작품을 출간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그 어떤 분야의 전문가로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문제가 있는 겁니다.” 79세인 그는 무엇보다도 우선 스토리텔러다.
Americans now hear their history in David McCullough’s clarion voice, the one that narrated the acclaimed Civil War and American Experience documentary series. Still, the two-time Pulitzer Prize winner and author of popular and praised histories of Harry Truman, John Adams, and Theodore Roosevelt, among others, doesn’t consider himself an expert on anything. (“If you think you are, you’ll get yourself in trouble.”) He is a storyteller first, who, at 79, is celebrating the success of his most recent book, The Greater Journey, about Americans in Paris, and who says he is “fired up” to start his next book.
이런 훌륭한 작가가 넘쳐나는 미국의 출판계가 부럽고 또 이런 좋은 책을 열렬히 사주는 두꺼운 독자층이 있는 것도 부럽다. 문득 든 생각.
대단하네요. 정말. 피드로 읽다가 감탄한 나머지 댓글 남깁니다..글 매번 잘읽고 있습니다>!
Sang Woo Ham
2013년 2월 28일 at 7:32 pm
감사합니다.^^
estima7
2013년 2월 28일 at 10:38 pm
읽어보려고 찾아보니 국내 번역본이 없네요. 이런 좋은 책도 번역해주면 좋으련만… ^^;
MyeongKeon Lee
2013년 3월 1일 at 3:45 am
전 아직도 거북이속도로 영어책을 읽지만 그래도 이나마 읽을 수 있게 된 것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어권에는 정말 좋은 책이 많은데 다 번역되는 것도 아니고 번역된 책을 읽으면 원래 저자의 의도나 문장력을 느끼기 힘들거든요. 길게 보시고 영어공부하세요~… ^^
estima7
2013년 3월 2일 at 10:56 am
이 글 읽고 아마존에서 Truman주문했습니다.^^
Ellery
2013년 3월 1일 at 2:11 pm
처음 부분은 약간 지루하니까 참고 읽으세요. 재미없어도 책임은 못집니다.^^
estima7
2013년 3월 2일 at 10:57 am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이전까지 미국에 대해 부정적인 책들을 몇권 읽었고(ex> 나는 미국이 싫다, 멍청한 백인들)
그래서인지 미국에 대해 힘만 센 깡패같은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에스티마님의 글을 읽으면서
초강대국 미국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자꾸 하게 되구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upinel9
2013년 3월 2일 at 3:37 am
제가 89년에 일본에 처음 가보고 당시 그들의 장점에 대해 감탄해서 일본어도 공부하고 열심히 연구한 때가 있었는데요. 94년에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나와서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을 보고 좀 답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잘나가던 일본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표피적으로 쓴 책이 그렇게 큰 반향을 얻는다는 것이 좀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어쨌든 당시 그렇게 일본에 대해서 감탄하다가 미국에 처음 가보고 느꼈던 것은 “뛰는 놈 위엔 나는 놈이 있다”였습니다. 저도 처음 가보기 전에는 미국영화만 보고 가진 미국에 대한 이미지 밖에 없었거든요. 위험하고, 총알이 난무하고, 다들 성적으로 문란한 사회… 뭐 그런 곳도 있지요.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다보면 참 똑같은 곳에 가도 다 다르게 본다는 것에 놀랍니다. 사람의 성격이나 관심분야, 지식수준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 다른 것 같습니다.
전 성격상 남에게 싫은 소리 잘 못하고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는 편이라 미국에 대해서 밝은 면에 대해서만 쓰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미국도 문제가 많습니다만 그래도 제가 배울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뭔가 느낄때 블로그에 적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이해해주시면 좋겠네요. ^^ 감사합니다.
estima7
2013년 3월 2일 at 11:09 am
매번 좋은 글 읽고 갑니다^^
녹색해바라기
2013년 3월 3일 at 3:53 am
[…]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문제가 있는 겁니다.”(https://estima.wordpress.com/2013/02/28/davidmccullough/ 에서 […]
전문가에게도 윤리는 너무나 필수적이다 | 마켓스토리
2013년 3월 9일 at 1:48 pm
무척이나 공감 가는 글입니다.. 미국 쪽 블러그나 카페? 같은 사이트에는 책을 읽고서 서평을 다는 곳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엔 네이버 카페에 출판사들이 제공한 책이거나 스스로 읽은 책에 대해 서평을 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트루먼 , 영어원본이실 뎉텐데요 ,,,, 읽는 데 오래 걸리진 않으션느지요 ?
한번 읽독을 해보고 싶습니다… 한글 완역본이 있다면 좋겠네요 …
항상 에스티마님,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때때로 출처 밝혀 다른 곳에 올리기도 합니다…
rapael99
2013년 3월 12일 at 1:04 am
트루만은 너무 책이 길어서 그런지 한국번역판이 없습니다. 일본어판도 없더군요. 저도 지금 매일 조금씩 읽고 있는데 두달가까이 된 것 같습니다…. 이번주 완독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stima7
2013년 3월 12일 at 10:41 am
글을 보고 책을 꼭 사서 읽고 싶었는데 국내번역본이 없다니 너무 안타깝네요. 부족한 실력이지만 원서를 사서 읽어봐? ^^
우희영
2013년 3월 26일 at 1:07 pm
제가 너무 뽐뿌가 느껴지게 글을 썼나요? 그런데 너무 긴 것이 문제입니다. 한권짜리 책으로 이렇게 두꺼운 책은 저도 처음 본 것 같습니다. ㅎㅎ
estima7
2013년 3월 26일 at 3:23 pm
[…] 일주일 걸려 쓴 책, 십년 걸려 쓴 책https://estima.wordpress.com/2013/02/28/davidmccullough/에스티마의 인터넷이야기Thoughts on Internethttp://s2.wp.com/i/buttonw-com.png ← It was pointed out that when using the… 만취 여대생 장기 적출 괴담, 알고 보니…. → […]
일주일 걸려 쓴 책, 십년 걸려 쓴 책 - 뉴스
2013년 4월 4일 at 8:00 am
[…] 일주일 걸려 쓴 책, 십년 걸려 쓴 책 | 에스티마의 인터넷이야기. […]
The Books | #eWord
2013년 4월 13일 at 9:51 pm
[…] 읽어봤는데 총 1120페이지짜리 긴 책을 너무나 흥미롭게 읽었다. (참고: 일주일 걸려 쓴 책, 10년 걸려 쓴 책) 그리고 “전기라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거”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
고인 이름이 없는 부고 | 에스티마의 인터넷이야기
2013년 7월 19일 at 12:34 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