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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의 NYT 부고 특집
미국언론의 넬슨 만델라의 타계 관련보도를 보면 서방 언론이 얼마나 그를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지난 몇년간 만델라가 병원에 갈 때마다 미국언론들이 남아공 현지 특파원을 동원해 호들갑을 떨면서 보도하는 모습을 보고 만델라가 정말 세상을 뜰때는 대단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가장 시청율이 높은 지상파뉴스인 NBC Nightly News는 12월 5일 만델라의 타계뉴스를 전하기 위해 평소 30분짜리 프로그램을 60분으로 늘려서 만델라 특집을 내보냈다.
그리고 NBC뉴스는 4일째인 8일저녁 뉴스까지도 만델라뉴스를 톱으로 비중있게 할애했다. 뉴스의 절반이 현지 르포, 만델라를 기억하는 미국인들의 회상 같은 것들이다.
미국전역에 위세를 떨치고 있는 아이스스톰은 만델라뉴스에 완전히 밀려버렸다. 만델라의 타계가 없었으면 아마 이 뉴스는 4일째 혹한소식으로 도배가 되었을 것이다.
NYT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종이신문에서는 1면톱에 이어 전면으로 3페이지를 할애한 긴 부고기사가 실렸다. 작은 책으로 내도 될 정도의 양이다. 2007년에 당시 편집국장이던 빌 켈러가 남아공을 방문해서 만델라를 (부고기사를 위해) 미리 인터뷰했을 정도로 오래전에 준비해 두었던 부고기사다.
어쨌든 NYT의 만델라 부고 특집은 종이지면보다 온라인에서 더욱 세심하게 준비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크린샷을 공유해본다.
우선 모든 기사의 중심이 되는 빌 켈러 전 NYT편집국장의 부고기사다. 그 위에 보면 Obituary, Slide Show, Posters, Memories, Speeches, Reactions의 순서로 메뉴버튼이 마련되어 있다.
슬라이드쇼에는 만델라의 일생을 보여주는 24장의 사진이 상세한 사진설명과 함께 나와있다.
역시 포스터섹션에는 만델라의 투쟁여정을 보여주는 중요 포스터가 전시되어 있다.
만델라의 Memories 부분에는 남아공지국에 근무한 역대 NYT지국장들이 나와 만델라에 대한 회상을 공유한다. 인터뷰 동영상까지 꼼꼼이 집어넣었다.
스피치부분에서는 만델라의 역대 주요 연설을 수록해놓았다. 중요부분을 하일라이트해두었으며 클릭하면 원문으로 이동한다.
반응부분에서는 전세계 주요 지도자들의 만델라의 타계에 대한 반응을 전한다. 유명인들의 트윗도 모아놓은 것이 재미있다. 그리고 하단 부분에는 뉴욕타임즈 독자들의 코맨트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을 모아 놓았다. 이런 NYT의 특집 정도면 만델라 기념박물관의 전시내용으로 그대로 옮겨도 될 정도다.
만델라라는 거인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부고기사에 정성을 들이는 미국언론의 모습에서 인물중심의 세계관을 느끼게 된다. 전기(Biography)장르가 한국보다 서구에서 휠씬 인기가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인물을 추모(Remembering)하면서 역사의 교훈을 배운다.
애플홈페이지도 만델라 추모에 동참했다.
어쨌든 27년의 처절한 감옥생활을 하고도 성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용서를 실천한 만델라 같은 사람은 정말 다시 나오기 힘들 것 같다. R.I.P. 넬슨 만델라.
고인 이름이 없는 부고
한국에서는 별생각 없이 지나치던 것에 외국 생활을 하면서 다른 점을 발견하고 문화의 차이를 느끼는 일이 있다. 신문 부고와 전기에 관한 문화를 보며 한국과 미국 사회의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느꼈다.
부고는 “어떤 사람의 죽음을 연고자에게 알리는 것이나 그러한 글”이라고 국어사전에 나와 있다. ‘부음’, ‘궂긴소식’(<한겨레>)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한국 신문 부고란의 대부분은 천편일률적인 형식을 따른다. “김○○ ××기업 전무 부친상=○○일 ○○시 ○○병원, 발인 ○○일 ○○시 전화번호”의 형식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부고 기사인데 정작 고인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한겨레>는 예외적으로 고인 이름을 적는다.) 고인이 현직에 있는 사람이거나 과거에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었던 사람이 아니면 그냥 자식들의 이름 다음에 ‘부친상’, ‘장인상’ 같은 식으로 처리된다. 특히 평범한 주부로 평생을 살아온 분의 경우는 거의 예외 없이 고인의 이름 없이 ‘모친상’ 아니면 ‘장모상’, ‘조모상’으로 나온다. 자식들의 이름만 직업이나 직함과 함께 열거된다.
한국에서는 당연한 듯 지나치던 이런 부고란의 문제점을 알아챈 것은 미국 신문의 부고란을 읽게 되면서부터다. 여기서 부고의 주인공은 고인이다. 그 자손들이 아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로다 레인버그. 82. 루이스의 부인. 리사와 데이비드의 엄마. 벤저민, 리오라, 시라의 할머니. 그녀는 따스하고 온화한 영혼, 낙천적인 성격, 유머, 호기심, 강건함, 세상을 따뜻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처럼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 부고의 목적이다. 더 긴 부고 글에는 고인의 인생 역정을 간결하게 소개한다. 자손들은 이름만 나올 뿐, 직업이나 직함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고인이다. 부고란을 읽는 재미도 있다. 사랑이 느껴진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에 와서 신기하게 느낀 것이 전기 장르의 인기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전기를 어릴 때나 읽는 위인전 같은 고리타분한 책으로 여겼다. 그런데 미국에서 전기나 자서전은 정치인, 기업인, 과학자, 예술인, 언론인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에 대해 끊임없이 신간이 쏟아져 나오고 읽히는 인기 장르다. 스티브 잡스 전기처럼 밀리언셀러인 전기가 많다. 서점에 가면 전기만 진열한 큰 서가가 따로 있고 평생 전기만을 쓰는 전업 작가들이 많다. 이런 전기들은 한 인물의 삶을 단순히 미화하기보다는 그 시대 상황을 세밀히 묘사하면서 공과 과를 균형있게 서술해 독자가 한 인물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왜 이렇게 전기가 인기가 있을까? 전기를 탐독하는 한 지인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역사책은 딱딱해서 읽기가 어려운 데 반해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의 전기를 읽으면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해 흥미롭게 역사를 배울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되고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런 의미에서 옛 인물의 생애를 따라가 보는 것은 독자에게 지혜와 용기를 준다는 것이다. 전기를 통해 일종의 멘토를 찾게 되는 것이다. 10여년간 링컨을 연구한 역사학자 도리스 컨스 굿윈은 2005년 <권력의 조건>(원제 Team of Rivals)이라는 링컨 전기를 펴냈다. 이 책은 스테디셀러가 됐고 2009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오바마에게 큰 영감을 줬다. 그는 이 책에서 라이벌을 끌어안는 링컨의 리더십에 자극받아 힐러리를 국무장관으로 영입했다.
이런 서구의 문화에 비해 우리는 사람의 인생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한국의 부고도 마치 문상 올 사람을 모집하는 것 같은 형식을 버리고 이처럼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형식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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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6일자 한겨레신문 ‘임정욱의 생각의 단편’칼럼으로 기고한 내용.
집에서 구독하는 NYT의 Obituaries란을 보다가 문득 한국신문의 부고란과 비교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찾아봤는데 (내 기억처럼) 역시 (한겨레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문부고란은 망자의 이름이 빠진채로 나와있었다. 그래서 저번에 블로그에 “한국신문의 부고, 미국신문의 부고“라는 글을 올렸고 이번에 한겨레칼럼으로 다시 써봤다.
사실은 18년전 신문사 사회부 신참기자로 일할때 부고란을 작성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아무 생각없이 팩스로 전달되어 온 부고게재요청을 형식에 맞게 적은 다음 전화번호가 맞는지 직접 걸어서 확인하고 신문에 실었다. “왜 망자의 이름은 없는 것일까”라는 생각은 못했다. 내 조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러던 것이 문화가 다른 나라에 가서 살게되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칼럼을 쓰고 나서 우연히 이 문제를 10년전에 지적했던 “신문 부고란엔 망자가 없다”라는 제목의 미디어오늘 기사(2003년게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런 부고문화를 풍자한 김승희시인의 ‘한국식 죽음’이란 시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더불어 이 시가 지적한 내용을 가지고 쓴 블로그글 “그런데 누가 죽었다고? … 김승희「한국식 죽음」“도 읽어보고 생각해볼 만한 글이다.
죽은 자의 신분은 자식의 지위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조문을 가는 사람들은 망자를 애도하기보다 산 자를 보고 돈을 내고, 산 자를 위해 식장에 좀 머물며 국밥을 먹을 뿐이다.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에 대한 정보로 가득한 부고란은 산 자들을 위해 죽음마저도 이용하려 드는 우리네 일그러진 장례 문화의 단면이다. 부고란은 죽은 자를 두 번 죽이고 있다.
우리 장례문화에 대한 이런 지적은 정말 뼈아프다. 어쨌든 이런 시, 기사가 나온지 10년이 지났는데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또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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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 후반부분에서 이야기한 미국의 전기문화는 올초 트루먼전기를 읽고 받은 감상이다. 유명한 전기작가인 데이빗 맥컬로라는 사람에 관심이 있어서 (해리 트루먼대통령에 대해서는 일절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읽어봤는데 총 1120페이지짜리 긴 책을 너무나 흥미롭게 읽었다. (참고: 일주일 걸려 쓴 책, 10년 걸려 쓴 책) 그리고 “전기라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거”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그리고 보니 미국에는 스티브 잡스전기를 쓴 월터 아이작슨(아인슈타인, 벤자민 프랭클린), 도리스 컨스 굿윈 등 기라성 같은 전기작가들이 많이 있고 정말 수많은 전기가 매달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처럼 전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독자가 있기 때문이다.
며칠전 뉴욕에 잠깐 출장을 갔는데 엄청나게 더운 날 30대초반쯤 되어 보이는 한 백인여성이 머리에는 얼음주머니를 엊은 채로 집안에 있는 잡동사니를 끌어다 길에 놓고 모두 $1라며 팔고 있다. 내 눈길은 끈 것은 무지 두꺼운 워싱턴 전기였다. 3년전쯤 나온 책이다. 당시 나는 “아니 세상에 워싱턴이면 우리나라의 세종대왕, 이순신장군 급의 위인인데 어떻게 또 새로 전기가 나오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전기는 모든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책이다. 본문만 822페이지다. 어쨌든 백만년쯤 뒤에 읽게 되겠지만 책 욕심에 이 책을 집어들고 1달러를 건냈다. 그러자 그 여성이 빙긋 웃으며 “He’s my hero!”라고 한마디한다. 이런 독자들이 있기 때문에 전기가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국신문의 부고, 미국신문의 부고
한 신문의 부고. 한국에 있을때는 아무 생각없이 지나가다가 미국에 와서 살게 되면서 이상하게 생각하게 된 것. 부고 기사인데 정작 ‘고인’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고인이 현직에 있는 사람이거나 과거에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었던 사람이 아니면 그냥 자식들의 이름 다음에 ‘모친상’, ‘장인상’ 같은 식으로 처리된다. 특히 평범한 가정주부의 경우는 거의 예외없이 ‘모친상’ 아니면 ‘장모상’, ‘조모상’으로 나온다. 고인의 이름없이 자식들의 이름만 열거되는데 게다가 왜 직업이나 직함까지 왜 꼭 나와야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다보니 내세울 것이 없는 형제자매의 경우는 ‘자영업’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평생 자식을 키우면서 본인의 이름없이 ‘OO엄마’로 불리우던 여성들이 눈을 감고서도 역시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은 미국신문의 Obituary를 읽게 되면서부터다.
저명인사가 아닌 경우 물론 공짜로 실어주는 것은 아니고 유료로 게재하는 내용이지만 고인의 삶을 돌아보는 이런 부고기사의 주인공은 ‘고인’이다. 그 자손들이 아니다.
페드라 에스틸. 100년 4개월 26일만에 세상을 떠난 나의 어머니. 그녀의 따뜻한 미소와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감쌌다. 그녀는 가장 멋진 엄마였으며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녀의 가슴, 영혼은 항상 나와 함께 했다. 그녀를 영원히 사랑하고 그리워할 것이다. 도비.
이처럼 간결하게 고인의 이름을 쓰고 추모하는 글을 쓰는 것이 참 마음에 든다. 줄줄이 자식의 이름과 직업, 직함을 열거할 필요가 있을까?
로다 레인버그. 82. 루이스의 부인. 리사와 데이빗의 엄마. 벤자민, 리오라, 시라의 할머니. 그녀는 따스함과 온화한 영혼, 낙천주의, 유머, 호기심, 용기, 세상을 따뜻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기억될 것이다.
한국의 부고기사도 마치 문상을 오는 사람을 모집하는 것 같은 형식을 버리고 이처럼 고인을 추모하는 형식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