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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잃어버린 영화평론가 로저이버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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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처음 미국땅을 밟았을때 일이다. 신문의 영화광고를 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Two Thumbs Up!”이란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했다. 그러다가 두개의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린다는 이 말이 로저이버트(Roger Ebert)와 진 시스켈(Gene Siskel)이라는 유명한 영화평론가 둘이 같이 ‘At the movies’라는 프로그램에서 좋은 영화로 합의해 추천한다는 뜻이란 것을 알게 됐다. (요즘 같으면 구글검색해서 위키피디아로 바로 뜻을 알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미국사람 붙들고 물어보는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엔 80년대에 작고한 정영일이라는 유명한 영화평론가가 있었다. 조선일보기자로 매주 주말의 명화를 해설하던 그는 “놓쳐서는 안될 영화”를 특유의 화법으로 이야기해 큰 인기를 모았었다. 시카고 선타임즈 영화담당기자인 로저이버트도 그런 사람이었다. 세계최고의 영화평론가중 하나로 불리우는 그의 할리웃에서의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의 엄지손가락에 영화의 흥행이 좌우됐다.  그런데 그의 파트너였던 Gene Siskel이 1999년에 뇌종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떴다. 그 이후 이버트는 Roeper를 새로운 파트너로 맞아들여 Ebert & Roeper로 ‘At the movies’프로그램을 이어갔다.

미국에 머물 당시에는 그의 활기찬 모습을 TV에서 대하거나 리뷰를 읽는 경우가 있었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만 몇년전인가 그가 낸 ‘위대한 영화’책이 한국에 번역된 것을 보고 그를 떠올렸을 뿐이다.

그런데 지난주 트위터를 통해 엄청나게 RT되는 기사를 클릭했다가 그를 만났다. 깜짝 놀랐다. 처음에 로저이버트 사진에 누가 장난을 쳐놓은 것 아닌가 했다.

에스콰이어지의 인터뷰기사를 읽고 로저 이버트의 팬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이었기에 깜짝 놀랐다. 알고보니 2002년부터 생긴 갑상선암으로 이버트는 여러번의 수술을 거쳤다. 죽을 고비도 몇번이나 넘긴 그는 끝내는 목소리는 물론 음식을 먹을 수도 없이 튜브로 영양분을 공급받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크리스 존스라는 기자가 쓴 이 인터뷰기사는 정말 명문이다. 너무너무 잘썼다. 영어권에서 엄청나게 RT가 되면서 화제가 된 이유가 이해가 된다. 이 기사는 목소리로 유명세를 얻고 인기를 구가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그 목소리를 잃어버린 로저이버트의 아이러니한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3일동안 그를 밀착취재해서 아주 디테일하게 로저이버트의 변화된 모습을 그려냈다.

재미있는 것은 로저이버트는 결코 죽지않고 새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Writer였던 로저이버트는 그동안 작가라기보다는 TV엔터테이너로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Writer였던 것이다. 말할 능력을 잃어버린 그는 기력이 쇠약해진 지금도 연간 거의 매일처럼 영화를 보고 리뷰를 쓴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밤마다 엄청난 열정을 글로 토해낸다. 영화이외에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 그의 생각을 쏟아내고 독자들과 소통을 즐긴다. 자유주의자임을 자부하는 그는 트위터를 통해 보수주의자인 러쉬 림보를 공격한다.

그가 애용하는 맥북프로는 그의 분신이다. 음성합성프로그램을 통해서 말을 하는 그는 처음에는 로렌스라는 영국액센트를 구사하는 프로그램을 사용했으나 지금은 알렉스라는 미국식액센트를 사용한다. 그리고 예전 그의 목소리를 Custom bulid해달라고 음성소프트웨어회사에 오더를 준 상태이다.

그의 요즘 모습은 위 동영상을 통해 볼 수 있다. 컴퓨터를 통해 나오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상당히 사실적이다.

위 에스콰이어인터뷰기사가 화제가 된 뒤 그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그 기사에 대한 감상을 밝혔다. 이버트가 에스콰이어 인터뷰에 응한 것은 그도 젊은 시절 많은 인터뷰를 에스콰이어지에 기고했으며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다만 인터뷰를 요청한 크리스 존스라는 기자에 대해서는 미리 그의 기사를 읽어보고 “이 정도 기사를 쓰는 사람이라면 인정할만하다”고 인터뷰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대체로 만족한다고… 다만 그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묘사에 대해서는 … “어차피 인간 모두가 서서히 죽어가는 것 아닌가?”하고 반론을 폈다.ㅎㅎ

워낙 재미있게 읽은 글인데 영어의 압박이 있어서 쉽지 않다. 그래도 관심있는 분은 로저이버트의 에스콰이어인터뷰를 일독하실 것을 권한다. 진짜 밀착인터뷰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Update: 위에 소개한 로저이버트의 컴퓨터 합성보이스가 드디어 나왔다.

Written by estima7

2010년 2월 23일 , 시간: 12:55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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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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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스콰이어 인터뷰 읽어보려다 7페이지까지 있다는걸 알고는 곧바로 read later 버튼 눌렀습니다. ㅠㅠ 내일 시간 내서 꼭 읽어봐야겠네요. 한국에서는 글 잘 쓴다는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미국에 와서야 writing의 중요함을 깨우치네요.

    Vin lee

    2010년 2월 23일 at 1:15 am

    • 영어의 압박때문에 괴로와서 그렇지… 이런 글을 읽으면 참 감칠맛이 나서 좋습니다ㅎㅎ

      estima7

      2010년 2월 24일 at 9:21 am

      • 이 정도의 명문을 쓰는 기자를 국내에서도 제대로 키워내야 하는데, 그냥 부럽기만 하네요. ^^ 영어글쓰기가 업인지라 이런 좋은 글을 보면 한편으로 글쓴이가 무지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막막함에 좌절모드로 빠지기도 하네요. ㅎㅎ

        초서

        2010년 2월 24일 at 10:47 am

  2. Skywalker의 생각…

    평론가 로저 에버트 영화 좋아할 때 한창 관심을 갖고 그의 평론을 읽었는데 지금 이런 모습이라니… 그래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영화를 대하고 있다….

    mktarcadia's me2DAY

    2010년 2월 23일 at 1:21 am

  3. 저도 이 글을 아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이버트가 시스켈을 그리워한다면서, I miss him so much, 라고 할 때 눈물이 핑 돌더군요. 에스콰이어, GQ, 배너티 페어, 심지어 플레이보이까지, 나중에 유명한 소설가나 시인으로 큰 사람들이 꼭 거치는 무대로 통하는 잡지들이죠. 사실 한국에도 이렇게 좋은 인터뷰와 프로필을 쓸 수 있는 기자는 꽤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다만 그런 지면이, 그리고 쓸 기회가 오그라든 거겠죠. 옛날 김훈 선배가 한국일보에 계실 때, 이처럼 강력하고 흡인력 있는 글을 많이 쓰셨죠. 아무튼 위에 열거한 잡지들말고도 뉴요커, 하퍼스, 애틀랜틱먼슬리 같은 미국 잡지들을 보면, 정말 감탄스럽습니다. 아무리 미국이 바보들로 채워져가고 멍청이의 나라로 전락해 간다고들 하지만, 미국 사회의 지성이 가진 내공은,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인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언제 보스턴엘 한 번 가봐야 하는데… 며칠전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저자가 Jamaica Plain에 산다길래 하도 특이한 이름이어서 찾아보니 보스턴이더군요 ㅎㅎ 잘 지내시구요^^

    김상현

    2010년 2월 24일 at 11:1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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